[읽으면 행복합니다] 근원 김용준 『새 근원수필』한줄기 청량한 바람속에 묻어나는 정갈한 삶의 향기봉화 시댁에 가면, 어쩌다 전우익 선생님 댁에 들르기도 한다. 언젠가, 부박하고 현란한 요새 글들에 대한 탄식 끝에, 문장의 참맛은 『근원수필(近園隨筆)』에 있다시기에 서울로 돌아와 찾은 책이 『새 근원수필』(열화당)이었다.'정갈하다, 담박하다'는 다른 이의 표현을 봤지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비대하지도 앙상하지도 않는 그의 글은 오랜만에 내 머릿속 활자의 어지러운 숲에 분 청량한 바람이었다. 자기 엄정함의 촘촘한 그물망을 거치고서도 자신의 글을 고작 "어릿광대의 춤" 정도로 치부해버린 무심함에도 전율이 일었으니. 이태준은 『문장강화』에서 "누구에게나 수필은 자기의 심적 나체"라고 하였거니와, 근원의 글을 읽는 동안 난초의 암향인지 혹은 묵향인지가 내 코끝에 감돌았던 것은 그의 삶과 지성의 향기가 진정 그러하였기 때문일까. 횡격막이 뻐근해지는 충동을 감당하기 어려워 나는 몇 번이고 책을 덮고 먼 산을 바라보았을 게다.나는 그의 글 속에서 한 번 울었다. 오감이 극에 달하는 지점이 사람마다 다른 것은 저마다의 삶의 자취와 추억이 다른 탓이니, 어느 한 부분에서 내가 울었다고 한들 그것이 다른 이에게 무어 별다를 것이 있겠는가. 어쨌거나, 근원의 노시산방(老枾山房)으로 인해 나는 나의 옛집과 옛 친구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의 그림 속 늙은 감나무는 나의 옛 친구와 참으로 닮았다. 근원은 유독 감나무를 사랑하였다. 이태준은 감나무가 있는 근원의 집을 '노시산방'이라 이름 붙여주었고, 근원은 그것을 기꺼워했다. 그러다가 절친한 벗 수화 김환기에게 노시산방을 넘기고 의정부 단칸방으로 옮긴 후 어느 날 뒷간에 앉아 읊조리다가 우연히 송씨라는 사람의 시를 발견하고 자신의 심경과 꼭 같은 데 놀란다.(그 순간 나 역시 근원의 마음이 나와 같은 데 놀란다.) <집을 팔고서>라는 제목의 그 시는 이렇다."어쩔거나, 근래 들어 뼈를 에는 가난으로 / 내 살던 집 이젠 벌써 이웃에게 넘어갔네. / 다정하게 뜰에 선 버들에게 묻노니 / 앞으로 날 만나면 행인처럼 보려는가!"어린 시절, 나는 앞마당의 늙은 감나무 가지 위에 기어올라가 종일토록 놀곤 했다. 나무껍질이 다 닳아 반질반질해지도록 매만지고 기어오르고 가지 위에서 살았으니, 집안 식구들이 어린 나를 찾을라치면 반드시 감나무부터 쳐다보곤 했던 것이다. 아버지를 졸라 그의 가지에 새끼줄 매어 그네를 타고, 나무 작대기로 일일이 벌레를 잡아주고, 봄엔 무명실에 꿴 감꽃 목걸이를 하고 다녔으며, 가을에는 잘 익은 붉은 감을 실컷 따먹었다. 나에게 그는 '제제의 라임오렌지나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은 이웃에 팔렸고, 다섯 형제들은 각자의 삶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가끔 눈물 속에 어른어른하는 것은 근 20년간 사귀었던 옛 친구, 늙은 감나무이다. 문사철(文史哲)을 갖춘 화가이자 비평가, 미술사가이자 수필가였던 근원. 그는 전쟁 중 월북하여 남한에서는 한동안 지워진 이름이 되었다. "사십 남짓한 나이에 수세기 이상의 세월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폭풍의 시절, "민족의 기구한 운명"에 휩쓸려야 했던 이 지식인의 운명이라니…. 1948년 {근원수필} 발문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예나 이제나 우리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무엇보다도 자유스러운 심경을 잃고는 살아갈 수 없다. 남에게 해만은 끼치지 않을 테니 나를 자유스럽게 해달라." 그나저나 근원의 정신은 저쪽에서 정말 자유로웠을까. 나는 어쩐지 시리고 슬프구나.- 김혜형(도서출판 돌베개 편집부장)/ 언론노보 327호(2002. 4. 17)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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