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노조의 전임자로서 임기가 두달 남았다. 최근에 느닷없이 '문화일보 노조를 소개하는 글을 써달라'는 주문을 받고서야 필자는 고민했다.내가 왜 사무국장이 됐지,그렇게 힘들어하면서 왜 고비때마다 노조 주변을 '배회'했지,정말이지 뭘믿고 지난 10개월을 깝쳤는지 자문했다.
문화노조는 다섯 살 바기다.이제 세상에 눈떠갈 나이.그런데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싶어진다. 91년 창간하자마자 정주영씨의 대선출마로 정치홍역을 치렀다.95년에는 노조출범 관련자를 전원 지방으로 전출하는 '인사파동'에 맞서 파업투쟁을 벌였고,결국 승리했다. 98년에는 IMF라는 철퇴를 맞아 현대그룹에서 분리,독립하는 과정에서 식솔중 30%를 내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그리고, 99년에는 경영정상화를 위한 사장퇴진운동까지 결행해야만 했다.
이 땅에서 언론이 가질수 있는 모순은 모두 집약해놓은 듯한 '태생의 원죄'.그 사슬을 벗어나기 위해 정치권력,자본권력,경영권력과 차례로 맞섰고 그 와중에서 파업, 인원감축, 급여삭감으로 스스로 삶을 옥죄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 식구 대부분이 왠만한 내,외부의 풍파에는 꿈쩍도 않는다. 마치 '무얼 그리 걱정하냐'라는 표정들이다. 그러면서도 아주 작은 일에는 과하다 싶게 집착한다.아침부터 '야,00가 아들 낳다며, 전화라도 해줘야지'류의 잡다한 수다가 늘어진다.지난 4월에는 최근 우리 동네로 옮겨온 10여명의 동료들을 축하해주는 모임을 가졌는데,한 새식구는 "참 사람 내음이 진동하는 동네"라고 촌평을 해줬다.노조사무실 간사(여직원)가 화재를 당했을때도 상당한 액수가 모금돼 모두들 "이 동네만 옛날로 돌아가는 것 같아"라는 말로 흐믓함을 나눈적이 있다.
문화노조의 가장 큰 특징을 '정(情)의 공동체'라고 한다.모든 여건은 불비하지만 사람이 살만한 동네를 만들기 위해 모질게 싸워왔다는 것이다.인간에 대한 신뢰가 최우선이고,그네들에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00회사'라는 껍질 이상의 준거를 마련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동네.필자는 이런 동네에서 사무국장이라는 업을 수행하며 사람에 대한 신뢰를 다시 익혀온 것이다.
물론 '정의 공동체'가 완전한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풍토가 조직운영의 효율성측면에선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또 연봉제,성과급제 처럼 개인의 능력평가가 우선시되는 노동환경에선 늘 '구식'으로 치부되기 쉽상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회사와 노조가 머리를 맞대고 10년을 내다보는 청사진을 마련하기 위해 '장기발전위원회'에 전력투구하면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변화'가 무차별 폭격을 해와도 '정의 공동체'는 포기할수 없는 노조의 깃발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저마다 '디지털 시대를 선도하는 언론'이라며 야단법썩을 떠는데 유독 아날로그 시대의 낡은 깃발을 다시 곧추세우려는 우리.그게 모순인줄 알면서도,그것이 우리가 갈 길이라고 믿는 것은 '사람이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라는 명제를 그 혹독한 시련속에서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승훈(문화일보 노동조합 사무국장)



/ 언론노보 281호(2000.5.17)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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