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적이게도 IMF는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촉발 시켰다. 언론 노동자들이 평생 직장으로 삼고 충성을 바쳐온, 그래서 심지어 각 개개인이 아이덴티티의 대상으로까지 삼았던 기업이 비정하게 자신들을 버린 사태는 언론 노동자들, 더 나아가 한국의 전 노동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들은 배신감에 휩싸였고 아무런 사회적인 완충장치도 없이 길거리로 내몰리는 절망을 맛봐야했다. 그들에게 기업은 이제 신뢰의 대상이 아니고 충성의 대상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비로소 계급의식이 눈을 뜨게된 것이다. 비로소 노동조합이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노동조합은 '민주화 운동'의 한 방편이었다. 계급의식에 기초한 체제 변혁 운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계급의식은 더 확산돼 나갈 것이다. 계급의식을 더욱 확대 강화시킬 IMF의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이 속속 시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분사, 연봉제 등이 그것이다. 이런 정책들은 기업 집단에 대한 충성심에 근거한 정책이 아니고 개인과 임금에 기초한 정책들이다. 결국 기업의 개인에 대한 통제력은 순전히 경제적인 보상에 기초하게 될 것이다. 각 개인들의 기업에 대한 충성심이 이완되는 현상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노동조합은 기업을 대신해 개별화된 노동자들을 묶어 내고 그들을 보호하는 구심점이 될 것이다. 이러한 조합원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새로운 조직으로의 변신이 그것이 바로 언론 산별 노동조합이다.
기업 단위를 뛰어 넘는 거대 조직으로서의 언론 산별 노동조합의 출범은 기업으로부터 버림받은 노동세력을 묶어내는 구심점으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이 탄생함을 의미한다. 또 정치 권력과 자본의 노동조합에 대한 지배를 근본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체제의 도입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그 동안 언론사에 내부화된 채로 처리됐던 문제들이 외부화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대상이 기업 지배 체제와 정치체제 문제로까지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기업 안에서 또는 기업을 통해 언론을 장악하거나 장악하려고 하는 자들은 기업 외부에 있는 강력한 산업별 노동조합과 대결하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IMF는 역설적이게도 자신과 기업을 동일시하고 평생 충성을 바쳐온 우리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갖게 하는 촉발제가 됐다. 우리들이 하기에 따라서는 IMF가 저들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언론 산별노조의 건설이 그 중 하나이다.


/ 언론노보 283호(2000.6.14)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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