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기자라면 부끄러워해야
삼성 비자금 의혹 보도, 무엇이 문제인가?



기자에게 ‘언론자유’란 공기처럼 소중한 것이다. 언론자유를 지키겠다고 일어났다가 1975년 동아일보, 조선일보 및 동아방송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1백 60여 명이 해직 당했다. 언론자유를 향한 열정이 뜨거웠기 때문에 1980년 전국 각 언론사에서 수백 명의 기자들이 길거리로 쫓겨나야 했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옥고까지 치렀다. 기자들은 최근 정부의 기자실 통폐합 조치에 대해서도 언론자유 침해라고 반발하고 있다.

정치권력에 맞선 기자들의 언론자유 수호투쟁은 이와 같이 거스를 수 없는 전통이 되었다. 나아가 이제 언론은 정치권력이 탄압을 꿈꾸기는커녕, 감히 맞서기도 어려운 또 하나의 권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정치권력에 대해서는 이토록 강하고 큰 언론이 경제권력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권력 앞에서는 작아지는 언론

언론이 경제권력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는 전형적인 사례가 바로 최근 터져 나온 ‘삼성그룹 비자금’ 의혹 보도이다. 삼성그룹 비자금 의혹은 지난 10월 29일 <한겨레 21> 보도에 이어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을 들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기자회견을 가짐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삼성그룹이 조직적으로 비자금을 조성, 관리하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삼성그룹은 국내 최대 기업이며, 기자회견을 갖고 삼성 비자금 의혹을 제기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공신력 있는 기구이다. 사제단 앞에서 양심고백을 한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에서 법무팀장을 지낸 인물이다. 더욱이 사제단은 지난 3일 정치인과 법조인들을 상대로 로비하라는 삼성 회장의 ‘지시사항’이 담긴 문건까지 공개했다.

사제단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김 변호사 양심고백 내용을 곧 추가로 공개하겠다는 예고까지 했다. 기자라면 누구나 사제단 회견 내용의 신뢰도가 얼마나 높으며, 또 얼마나 큰 폭발력을 가진 내용인지를 알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한겨레>와 방송뉴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이 이를 묵살하는 태도를 보였다.

지난 5일에는 김용철 변호사가 사제단과 함께 직접 기자회견을 갖고, “삼성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돈을 받은 인사들 가운데는 현직 검찰 최고위 간부도 여럿 있다”면서 “검찰은 삼성이 관리하는 작은 조직에 불과하고, 이해관계가 맞물린 국세청과 재경부는 돈의 규모가 더 컸다”고 주장했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진실공방으로 몰아간 신문

그러나 이를 머리기사로 보도한 언론은 방송 뉴스를 제외하면, 중앙일간지 중에서는  <한겨레>가 유일했다. 대부분의 신문은 대선 관련뉴스를 1면 머리로 올리고 김 변호사 회견 기사의 비중을 줄였다. 그러나 이들 신문의 보도가 드러낸 더 큰 특징은 김 변호사의 주장과 삼성의 반박을 같은 비중으로 보도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중앙일보>의 경우 “변호사와 삼성이 폭로와 반박성 해명을 내놓으며 ‘진실공방’을 벌이고 있어 과연 누구 말이 맞는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앙일보> 기사는 제시된 사실을 구미에 맞게 가공하기 위해 언론이 구사하는 편집기교의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우선 축소보도이다. 김 변호사의 회견을 1면 하단 구석에 단 4문장의 기사로, 내용은 없이 회견사실만 보도하고, 내용은 8면으로 돌렸다. 다음에는 초점을 흐리게 하는 과정이다. 회견기사의 경우 회견의 내용을 앞세우고, 이에 대한 이해관계자의 반응을 따라 붙이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문제의 기사 4문장은 회견했다는 사실, 김 변호사가 ‘떡값’ 검사의 명단을 내놓지 않았다는 사실, 회견에 앞서 삼성이 반박자료를 내놓았다는 사실, 그리고 누구의 말이 맞는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한 문장씩 언급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일보>는 이 짧은 기사 속에서, 김 변호사의 회견 내용을 전하기 전에 이를 삼성 쪽의 반박과 묶어 ‘진실공방’이라는 성격규정부터 했으며,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지”하는 의문을 던짐으로써, 회견 내용의 신빙성에 결정적인 일격을 가한 것이다.

여기서는 <중앙일보>를 사례로 들었지만, 다른 신문들의 보도도 대동소이했다. 신문보도들은 특히 변호사가 떡값을 준 검사의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현직 권력자들이 대거 포함된 명단 공개를 ‘개인 김용철’에게 요구할 일은 아니다. 이것은 언론이 심층취재를 통해 채워 넣어야 할 ‘빈칸’이며, 검찰이 수사를 통해 밝혀내야 할 부분이다.

삼성그룹 비자금 의혹을 폭로한 한 용기 있는 변호사의 양심고백이 우리사회의 만성적 불의를 햇볕아래 드러내는 기회가 될 것인지, 아니면 유야무야로 뭉개져 버릴지는 속단할 수 없다. 지난 5일 사제단이 발표한 호소문은 “정의와 공동선 실현에 솔선해야 할 언론과 검찰, 국세청과 금감원 같은 국가기관이 이러한 사회적 불의를 묵인, 방조하고 더 나아가 거대한 먹이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이 엄연한 불법적 현실 속에서 참담함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참담한 언론 현실에 대한 기자들의 철저한 반성이 필요하다. 김 변호사의 양심고백에 대한 현재의 보도태도를 합리화 하는 논리를 펴는 기자들도 있을 수 있다. 이유를 찾으려면 백 가지도 더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 회견기사의 보도태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기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우선 자신의 사고체계를 점검해 보는 것이 좋다. 자기검열의 태도가 몸에 배어 있지나 않은지, 동료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번지는 부화뇌동이나 의식의 동조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반성해보아야 한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기자라면 패배주의 속으로 숨지 말고, 의식과 실천을 일치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기 바란다.


// 언론노보 제443호 2007년 11월 7일 수요일자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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