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있는 보도 ‘근거없는 추정 배격, 정치적 악용 경계’


1971년 8월 그 유명한 ‘실미도 사건’이 발생했을 때였다. 대간첩대책본부장인 김재명 중장은 ‘북괴 무장공비의 소행’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무장간첩들이 인천 남부 송도에 출현해 군인들과 교전하다 시외버스를 탈취해 경기도 부평 소사를 거쳐 서울 대방동에 이르러 군경의 집중사격을 받자 일부는 도주하고 일부는 버스 안에서 자폭했다’는 것이었다. 수도 서울이 무장공비에게 어처구니없이 뚫렸다는 발표에 시민들은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장 목격자들로부터 무장공비가 아닌 것 같다는 말이 나오고, 생포된 부상자가 자신은 특수부대원이라고 진술하자 국방부는 정정 발표를 하게 된다.

그렇다면 군 당국은 왜 처음에 소설에 가까운 ‘북괴 무장공비의 소행’이라고 발표했을까? 마침 그날 오전 김재명 중장은 ‘최근 무장공비 남파가 늘고 있다’는 발표를 했었다. 그리고 무장괴한들이 나타나자 김 중장은 침투 수법과 대담성이 무장공비와 흡사하다는 심증을 굳히고는 ‘북괴 무장공비’라는 발표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그대로 보도한 기자들과 경악한 시민들 모두 ‘북한이 아니면 누가 그런 짓을 했겠느냐’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가 곧 발표된다. 그러나 벌써부터 ‘북한 소행으로 사실상 결론을 내렸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북한이 개입됐다는 명백한 증거, 이른바 ‘스모킹 건(Smoking Gun)'이 제시된다면 논란을 끝내고 반인륜적 범죄를 규탄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 증거도 없이 ‘북한이 아니면 누가 그런 짓을 했겠느냐’는 가정에 근거해 결론을 내린다면 이는 무책임하고 위험스러운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실미도 사건 때도 현장 목격자나 인질, 생존자의 진술이 없었다면 과연 당국의 발표가 수정됐을까 의문이다.

민주언론실천위원회는 이번 천안함 조사결과 발표와 관련해 국민에게 책임있는 보도를 할 수 있도록 언론이 2가지 원칙을 견지할 것을 촉구한다. ‘근거없는 추정 배격’과 ‘정치적 악용 경계’이다. 군 당국이 어떤 결론을 내리든 책임있는 근거를 요구하는 것은 언론의 사명이다. 발표 내용을 검증하고 적극적으로 감시 비판하는 것은 보도의 ABC다. 언론이 이같은 감시자의 책임을 저버리고 단순 중계에 그치거나 오히려 과잉 보도에 나설 경우 국민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적 악용’은 6.2지방선거에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미 지난 두 달간 북풍설이 한껏 부풀려져왔기 때문에 이번 결과 발표에서 명백한 근거가 제시되지 못하면 여당이 기대하는 북풍은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문제는 ‘북풍’ 그 자체가 아니다. 북풍 논란이 부각될 경우 무상급식, 4대강, 세종시 등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대답한 이슈들(5.4~6 SBS.중앙일보 여론조사)이 또다시 ‘천안함 블랙홀’에 파묻혀버릴 위험성이 크다. 이번 선거를 ‘공안선거’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정책선거’로 만들 것이냐는 언론인들의 선택과 노력에 달려 있다.

“이번 사건에서 보여준 당국의 갈피를 못잡는 대국민 공보태도도 문제가 되겠지만, 처음부터 많은 의아점을 가지고 있는 당국 발표를 아무런 비판적 태도의 표시도 없이 그대로 보도하고, 심지어 마치 스포츠 중계와 같은 태도로 센세이셔널하게 다룸으로써 국민의 불안감을 조성한 흠이 없지 않았다는 것은 국민으로부터 통렬한 규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자성하지 않을 수 없다”

천안함 사건을 다룬 한겨레나 경향의 사설이 아니다. 1971년 실미도 사건 직후 중앙일보가 낸 사설이다. 이 내용이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왜일까?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주언론실천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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