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 가운데 방송사들의 보도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뉴스를 꼽으라면 누구든 '정주영씨 사망' 소식을 꼽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타계 당일인 21일만 봐도 밤 10시 18분부터 MBC가 정규 드라마 중간에 뉴스속보를 13분간 긴급 편성했고 SBS는 11시 8분부터 2분간 뉴스특보로 '정씨 사망' 소식을 다뤘다. KBS는 뉴스특보를 내보내지 않았지만 역시 밤 11시 뉴스라인을 통해 정씨 사망 소식을 비중 있게 다뤘다. 타계 다음날인 22일에도 '정씨 사망'이 다른 뉴스를 압도하고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물론 국내 최대 재벌의 회장으로서,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와 남북관계에도 깊은 족적을 드리운 그의 부피를 감안하면 이같은 편집을 마냥 편향된 것으로만 재단할 순 없을 것이다. 타계 당일 뉴스 속보에 대해 방송사에 쏟아진 시청자들의 의견을 봐도 그러하다. 방송사에 쏟아진 시청자들의 반응은 '뉴스 가치가 있다'는 의견과 '그만한 가치는 없다'는 의견이 크게 엇갈렸었다. 문제는 역사적 평가가 필요한 인물에 대해 추모와 애도 일변도로만 접근하는 보도 태도가 또다시 반복된 점일 것이다. 타계 다음날인 22일 각 방송사 보도의 제목만 훑어봐도 객관적인 평가 보다는 시청자들의 감상에 의존하고 있는 점이 느껴진다. (MBC '나는 노동자일뿐' '떠나간 거인' SBS '한국경제 큰 별 지다') 어떤 보도는 박정희로 대표되는 개발 독재 시대부터 전국민적인 미덕으로 선전돼 오다가 IMF를 맞아 그 비효율과 허상을 만천하에 드러낸 불도저식 경영을 갑자기 칭송하기도 했다.(KBS '하면 된다 신화') 경영 세습과 전근대적 노사관등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사안은 도외시 됐지만 고인의 검소함에 대한 미화에는 마치 방송 3사가 입을 맞춘 듯 했다.(MBC '정회장의 구멍난 장갑' KBS '세평짜리 묘지' SBS '큰 뜻 작은 묘') IMF 이후 재벌체제의 황제경영을 비판해온 그동안의 보도태도에 익숙해 있던 시청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만한 것이었다. 간혹 정주영씨의 공과를 따진 리포트가 있긴 했지만 과오보다 공적을 앞세운 내용이었고 그나마 전반적인 애도와 추모 분위기 속에 묻혀 버렸다. (MBC '파란만장 86년, SBS '도전 개척의 일생') 타계한 인물에 대해서는 공과를 제대로 따지지 않는 이러한 보도 태도는 얼마전 세상을 뜬 서정주 시인과 김기창 화백의 경우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방송보도는 그들의 친일 행적이나 독재정권과의 유착등 과오는 거의 짚지 않았고 고인의 예술 세계에 대한 찬미로만 화면을 메웠었다. 사자에 대해 미화 일변도로만 보도하는 관행은 결국 시청자들의 망각에 어느 정도 의존하는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후손들에게는 그릇된 정보뿐만 아니라 역사 의식의 불감증과 허무주의를 이식하는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 아이엠에프 직전 우리 사회를 풍미했던 박정희 신드롬도 결국 언론이 역사적 평가를 감당하지 않은데 따른 필연적 귀결일지 모른다. 이번 '정주영씨 사망'의 경우 역시 차분하게 공과를 함께 조명하는 보도가 좀 더 많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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