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종철 16대 동아투위 위원장

“언론자유는 실천투쟁으로 얻어진다” “제작거부로 7년 출입한 기관원 몰아내”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1974년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 선언, 12월16일부터 시작된 박정희 정권의 광고 탄압, 국민들의 격려 광고, 그리고 75년 3월17일 새벽 동아일보 내에서 자유언론 사수를 위해 단식 농성 등을 벌이던 언론노동자들은 회사에서 폭도들에 의해 강제로 쫓겨난다. 그날 동아투위는 결성됐고, 3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회사에 복귀하지 못한 채 자유언론을 위해 ‘투쟁’중이다.

동아투위 위원 중 18명은 세상을 떠났고, 현재 95명이 남아 ‘3.17 대학살’에 대한 책임 규명과 명예회복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지난 이명박 정권 때 언론장악에 맞선 언론노조의 투쟁의 현장에서 백발의 동아투위 위원들의 얼굴은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 동아투위는 또 다시 언론자유 투쟁을 벌이는 후배 언론노동자들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지난 5일 16대 동아투위 위원장인 김종철 위원을 만나 38년 동안 끊임없이 투쟁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을 물어봤다.

아울러 오는 5월27일 4시 프레스센터 20층 기자회견장에서는 동아투위 활동을 엮는 책 ‘1975(가 제목)’ 출판기념식이 열린다.

-동아투위 결성 38주년이다. 올해 계획은?

지난 3월17일은 해직 38년이 되는 날이면서 동아투위 결성 38년이기도 하다. 올해 동아투위가 특별한 사업계획을 세우지 않았지만, 지난해 대선과 총선에서 민주세력 좌절을 겪는 것을 보면서 동아투위 역할을 고민했었다. 언론분야에서 자유언론과 공정언론, 독립언론의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절실해지고 있다. 우리는 40년 가까이 경험을 했고, 언론 문제는 우리 힘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명박 정권 때 해직 언론인, 언론 대투쟁하다 징계 당한 후배들이 현업에서 어렵게 싸우고 있다. 동아투위와 80년 해직 언론인, 새언론포럼 등이 현 언론분야에 대한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우선 자주 만나 어떻게 언론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논의할 것이다. 새롭게 언론자유 쟁취를 위한 큰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모임의 취지다. 동아투위는 그것에 주력을 하겠다.

- 10.24 선언*을 하게 한 힘은 무엇인가?
1974년 3월 조학래 기자를 위원장으로 노조 설립을 했지만 서울시청으로부터 신고필증을 받지 못해 법외 노조로 있었다. 회사는 노조를 탄압했고, 노조 위원장 등 13명이 한 달 동안 해직되기도 했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주도한 것은 노동조합의 힘이었다. 당시 긴급조차 4호가 있었던 때라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에 정면 도전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행사는 긴박하게 진행됐다. 처음 기자들만 150명 정도만 있다가 편집국 3층, 4층 방송국 피디 아나운서 엔지니어가 내려와 동참했다. 그날 말하자면 혁명적인 분위기였다. 다른 언론사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 10.24 선언 후 무엇이 변화됐나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동아일보 일면에 크게 보도할 것을 요구했다. 경영진은 거부했고, 우리는 제작거부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밀고 당긴 끝에 일면 3단으로 보도한다는 타협안이 경영진에서 나왔다. 송건호 편집국장이 중간에서 연락을 해줬다. 타결된 것이 밤 11시였다. 그날 신문이 결간됐다.

일제 강점기 이후 최초로 신문이 결간된 것이다. 동아방송에서도 보도가 됐다. 그날부터 중앙정보부나 보안사 등 기관원들이 동아일보에 출입하지 못하게 됐다. 67년 이후 출입한 기관원이 7년 만에 자취를 감춘 것이다. 역사적 사건이다.

- 38년 해직기간 중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동아일보에서 강제로 쫓겨난 이후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9호를 내렸다. 모든 신문 방송은 유신체제 비판하거나 노동자 집회 등의 보도를 단 한 줄도 못나가게 된 것이다. 당시는 지금처럼 뉴스타파와 같은 최첨단 대안 매체를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등사기로 77년부터 78년까지 보도가 안 된 내용을 모아 ‘민주 인권 일지’*를 냈다.

그 사건으로 안종필 위원장을 비롯해 10명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연행됐고 구속됐다. 한국 현대 언론사에서 정권과 맞선 사건으로 최대 구속 인원일 것이다. 나의 경우 성명서 읽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 동조했다는 것이 구속 사유였다.

- 동아투위 투쟁할 수 있는 동력은?
모두가 투쟁의 주체가 되지는 않았지만, 제1차 선언부터 3차 선언을 함께 발표해 나갔다. 73년 서울 문리대 시위 데모 소식이 보도가 안 되자 젊은 기자 50여명이 동아일보 안에서 밤새워 농성을 했다. 조직적으로 강력해 진 것이다. 몇 일 뒤 기사는 일단으로 나왔다.

이 같은 사실은 대학가로 전파가 됐고, 운동은 번졌다. 마침내 2단, 3단 그리고 사회면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다뤄졌다. 기사 1단의 벽이 깨진 것이다. 우리는 노조 결성하면서 해직도 됐고, 이후 감옥 갈 각오로 투쟁했다. 쫓겨난 113명은 늘 함께 했다.

- 동아투위 투쟁의 현재적 의의가 있다면
긴급조치 속에서 언론은 침묵했다. 침묵에 이어 기득권에 안주해 비겁하게 권력에 굴종하고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언론이 되어가기도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공정한 언론이 되려고 노력했고, 선언을 하게 됐다. 그것은 국내 정치 사회 문화에 충격을 줬고, 결과적으로 유신독재에 민중적 저항을 불러왔다.

이후 전두환 정권 때 언론은 다시 침묵했지만, 언론인들의 투쟁은 이어졌고, 80년 해직 사태가 발생했다. 이 같은 흐름은 계속해서 이어져 왔고, 언론사 낙하산 저지 투쟁과 언론대투쟁으로 이어져 왔다. 언론자유는 투쟁으로 얻어져 왔다.

- 박근혜 정부에 요구한 사항은
2008년 진실화해위에서 박정희 정권이 동아일보에 광고 탄압을 가하고, 압력을 가해 해직시켰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현 박근혜 대통령은 75년 3월 17일 당시 퍼스트 레이디였기에 강제 해직 사태를 몰랐을 리 없다. 이는 아버지 때 발생한 문제로 역사적으로 잘못했다는 평가가 났다. 자유언론 실천 운동을 한 죄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민주화 발전 등 공을 인정하고 유감으로 생각한다든지 잘못된 일이라든지 공식 성명이 있어야 한다. 박 대통령은 대선 직전에 긴급조치 피해자의 명예 피해 보상 관련 법에 서명을 한 바 있다. 대통령이 됐으니 이제 법을 만들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권력이 언론을 지배하고 장악하려해서 사회를 발전시킨 사례는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것을 교훈으로 삼아야 하다. 대통령이 언론과 소통의 길을 열지 못할 경우 그것은 본인이나 정부를 위해서도 좋지 않다.

- 이명박 정권 하에 해직된 언론인 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회사는 인사권을 무기로 언론인을 약하게 만든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좌절하지 말고 길게 보자. 기자, PD 등 모두 힘을 합치고 길게 보자. 물론 투쟁 중에 이탈자 또는 길을 바꾸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동아투위 위원들은 감옥을 가고, 고문도 당했고, 생활고도 겪었다. 그렇게 여러 해를 지내다보니 한겨레신문도 창간도 됐고, 좋은 일도 많이 있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동아투위 위원은 81세이고, 70세 이하는 30명도 안 된다. 하지만 자유언론 실천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당시 우리의 투쟁을 후회하는 사람은 없다. 언론자유와 독립적인 언론이 이뤄질 때까지 길게 보고 같이 나아가길 바란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이 유신 독재가 언론에 재갈을 물린 참담한 상황에 울분을 모아 채택한 실천 선언으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 △기관원 출입 거부 △언론인의 불법 연행이 자행되면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는다 등 3가지 결의를 한다. 선언 중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 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하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 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대목은 현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민주민권일지 = ‘보도되지 않은 민주 인권사건일지’로 동아투위 소속 기자들이 박정희 정권에 맞서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권현장에서 수집한 자료를 묶어 냈다. 1978년 10월 24일 명동 한일관에서 각계 인사에게 배포했다.


□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은?
1944년 9월 충남 연기군(현재 세종시) 출생
1968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학과 졸업
1967~75년 동아일보사 기자
1984년 4월~1988년 2월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공동대표
1985~88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대변인, 사무처장
1988~98년 6월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편집부위원장
1995~07년 사단법인 한국 베트남 함께 가는 모임 이사장
1998~00년 8월 연합뉴스 대표이사
2008년 3월~2013년 2월 인천 재능대학교 초빙교수
2013년 동아투위 위원장




 

저작권자 © 전국언론노동조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