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뒤 고위 공무원, 정치인들의 부적절한 발언과 처신이 잇따라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반성과 수습의 책임을 지닌 사람들이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은 물론 온 국민들이 함께 느끼고 있는 슬픔과 분노에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팔걸이 의자에 앉아 컵라면을 먹는 모습을 연출한 서남수 교육부 장관, 또 “라면에 계란을 넣어서 먹은 것도 아니고, 끓여서 먹은 것도 아니다” 라며 그를 비호하려 한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를 보도한 언론사들이 이를 보도하지 않은 다른 언론사들에 의해 출입처인 청와대 기자실(춘추관)에서 ‘출입정지’ 징계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 전제)를 깼다는 이유다. 애초 청와대가 중대한 공적 업무에 대한 정보도 아닌 “라면에 계란 넣어서 먹은 것도 아니고 (…)” 따위의 발언에 비보도를 요청했다는 사실 자체가 비상식적이다.

그러나 청와대 출입 기자들이 이를 받아들여주고, 지키지 않은 동료 기자들에게 합심해서 징계를 내렸다는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다. 권력의 최정점인 청와대를 출입하면서, 그에 걸맞는 책임으로 권력의 행태를 감시해야 할 기자들이 권력의 요구에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 5월 9일자 경향신문 1면 기사


비보도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출입정지 징계를 받은 언론사 4곳 가운데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은 지면을 통해 동종업계의 행태에 쓴소리를 하고 나섰다. 경향신문은 출입처 징계가 내려진 다음날인 5월 9일자 1면 하단에 박래용 정치부장이 쓴 ‘기자메모’를 실었다. <청와대 대변인의 ‘계란 발언’ 보도했다고 출입정지… 부끄러운 ‘1호 기자들’>이란 제목의 칼럼이다. 일간지 1면에 기자가 쓰는 칼럼이 들어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박 정치부장은 “통상 오프가 깨질 경우 당국자의 발언은 ‘비보도 약속’이 해제되고, 이후부터 자유롭게 보도하는 것이 관행이다. 그러나 청와대 기자 간사단은 이례적으로 ‘비보도’를 계속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박 정치부장은 관련 기사에 대해 “세월호 참사 엿새째였던 당시에 나온 민 대변인의 발언은 청와대의 현실 인식이 어떠한지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초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그런데도 기자단은 대변인의 부적절한 발언을 알리기보다 오히려 새나가는 것을 막으려 했으니 언론의 책무를 내동댕이쳤다고밖에 볼 수가 없다”며 동종업계의 행태에 날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한겨레신문은 같은 날 4면에 <“교육장관이 라면에 계란 넣어 먹은 것도 아니고…” 청와대 대변인 발언 보도에 ‘출입정지’ 중징계> 제목의 기사를 싣고, 청와대 출입 기자단의 징계 결정을 비판했다. 기사는 해당 사건을 보도한 한겨레의 결정에 대해 “세월호 참사로 온 국민이 슬픔에 빠진 상황에서 청와대 대변인의 발언이 대단히 부적절했으며, 이미 발언 내용이 널리 알려진 뒤여서 ‘비보도 약속’은 의미를 상실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또 기자단에 공식적으로 재심 요청을 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며, “기자단이 민 대변인의 발언에 대해 ‘비보도 약속’을 계속 유지하기로 했더라도, 이미 사실이 알려져 실질적으로 ‘보도가 된 사항’인데다, 발언 내용이 대통령의 경호상 필요한 ‘포괄적 엠바고’도 아니고, 국가안위나 개인의 안전 문제가 결부된 사안도 아니어서 ‘비보도 약속’이 계속 유지돼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한겨레신문은 다음날인 10일 <청와대 기자단, 사명도 상식도 버렸다> 제목의 사설에서도 “문제가 된 서남수 교육부 장관의 행동에 대한 청와대의 평가, 그리고 그것을 비판하는 세간의 여론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언론으로서는 마땅히 보도할 가치가 있는 사안이다. 이렇게 중요한 발언을 안 쓰는 언론이 오히려 비정상적이다. (…)청와대 기자단의 행태는 권력 감시견이라는 본연의 사명을 잊고 스스로 권력화한 일부 언론의 자화상을 잘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비보도 전제가 깨졌는데도 민 대변인의 발언을 보도하지 않았던 대다수 언론들은 이 같은 청와대 기자단의 징계 결정 역시 보도하지 않았다. 청와대 춘추관에는 현재 180여명의 기자들이 출입을 하고 있으며, 중앙일간지·통신·방송사·경제지·인터넷 매체·영문뉴스·지역언론 등의 분야에서 이들을 대표하는 7명의 기자가 간사단을 구성하고 있다. 이번 징계는 간사단에서 다수 의견으로 결정됐다고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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