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언론으로 대표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 이후 90여년의 지면을 꼼꼼히 분석한 책, <조선일보 대해부>와 <동아일보 대해부>가 나왔다.

공동집필을 맡은 김종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 위원장과, 문영희 동아투위 위원, 김광원 저널리즘학연구소 소장, 강기석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은 3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8층 언론노조 대회의실에서 출판기자간담회를 열고 출판의 취지와 의미를 밝혔다.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은 "조선일보나 동아일보가 창간 된 이래 현대사에 끼친 부작용이 크다는 것은 웬만한 진보세력뿐만 아니라 시민들 사이에서도 많이 퍼져있는 인식"이라며 "하지만 이들 신문이 어떻게 지면을 만들어 왔는지에 대한 분석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김종철 위원장은 "1990년대부터 조중동에 대한 여러가지 비판이 있었고, 안티조선이라는 이름으로도 여러 책이 나왔지만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저술뿐이었고, 그 밖의 시기에 대해서는 총체적인 연구가 없었다"며 "두 신문이 어떤 보도와 논평을 해왔는지 총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점검하고 분석·평가한 책"이라고 전했다.

'민족지'였다고 주장하는 조선·동아, 분석 해 보니 '친일'일색

각 5권씩 총 10권으로 구성된 <조선일보 대해부>와 <동아일보 대해부>는 1920년 창간부터 최근의 이명박 정권까지 90여년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사설과 기사를 분석했다.

<동아일보 대해부>에서는 김성수와 동아일보 사람들이 대일본 제국에 대한 충성을 바치는 친일행위 (1권), 한국민주당의 기관지가 된 이유(2권), 자유언론실천운동을 걷어찬 동아일보(3권), 광주 5월 항쟁 때 닷 새 동안 실리지 않은 사설(4권), 김대중 정권과 '철천지 원수'사이로 변한 이유(5권)등 시기별 기사와 사설, 당시 편집국 내부의 움직임을 전달했다.

<조선일보 대해부>에는 총독부 기관지와 별 차이가 없었던 조선일보(1권), 극우 반공적 신문으로의 변모(2권), 친박정희와 중도를 오가는 기회주의(3권), 전두환 용비어천가(4권), 조선일보의 '노무현 죽이기'(5권)등의 내용이 실렸다.

김종철 위원장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서로 '민족지를 창간했다'고 주장하지만 분석 결과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게 드러났다"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짧은 기간 좋은 지면을 만들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지면을 분석했을 때 반민족·반민중·반민주신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공동 저자들의 의견"이라고 밝혔다.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 배우는 데 도움 될 것"

조선일보·동아일보 대해부 시리즈는 언론학을 배우는 학생들이나 학자들에게 좋은 사료가 될 전망이다. 김광원 저널리즘학 연구소 소장은 "조선일보가 도서관이나 기관에 배포하는 아카이브에는 전두환에 대한 칭찬과 찬양을 한 지면이 다 빠져있다"며 "역사의 기록자로서 언론의 역할을 망각하고 있는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지적했다.

김광원 소장은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은 진실보도"라며 "대학생들은 기본적인 저널리즘에 대한 인식이 없는 상태다. 언론이 역사의 최초 기록자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현실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전했다.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은 "대학에서 언론의 역사를 가르치는 과목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며 "저널리즘을 공부하는 학자들이나 학생들이 한국 언론의 역사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대해부 요약 자료
(동아투위 제공)
 

1920년 3월 5일 창간된 조선일보와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는 한국 현대사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매체들이다. 두 신문은 일제강점기 말인 1940년 8월부터 해방 뒤인 1945년 말까지 강제폐간 당했던 시기를 제외하고 지난 90년 가까이 지면을 제작해왔다. 현재 조선·동아일보는 중앙일보와 함께 수구보수세력을 대변하는 강력한 신문으로 작용하고 있다. 스스로 권력이 되어 정권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이다.

조선·동아 대해부의 공동저자들은 두 신문이 기나긴 세월에 걸쳐 어떤 보도와 논평을 해왔는지를 총체적으로 객관적으로 점검하고 분석·평가하려고 노력했다. 두 총서의 간략한 내용과 공동저자들이내린 결론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선일보 대해부 5권

1권은 1920년 3월 5일 조선일보 창간 때부터 1940년 8월 10일 일제가 조선일보를 강제 폐간하던 날까지, 그리고 그 이후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가 ‘친일행위’에 열중한 8·15 해방 이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2권은 1945년 11월 조선일보가 복간된 때부터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주동한 군사쿠데타 전날까지, 3권은 그 5월 16일부터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한 1979년 10월 26일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4권은 박정희의 죽음 직후 ‘신군부’라는 이름으로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유신독재체제’를 실질적으로 이어받은 전두환·노태우 정권, 그리고 3당 야합에 힘입어 ‘문민정부’를 세운 김영삼 정권까지 조선일보가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어떤 보도와 논평을 했는지를 짚어본다. 5권은 1998년 2월 25일 출범한 김대중 정권에서 노무현 정권을 거쳐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조선일보의 행적을 추적한다.

* 1권 : 총독부 기관지와 별로 차이가 없었던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대정실업친목회’라는 친일단체의 간부 예종석 등이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창간을 주도한 ‘친일파 신문’이었다. 3·1 독립투쟁의 열기에 놀란 일제는 조선 민중의 혁명적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는 지하신문들을 탄압하면서 ‘문화통치’라는 이름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시사신문의 발행을 허가했다.

1924년 9월 독립운동가 출신 신석우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한 뒤 ‘사회주의 계열’ 기자들과 함께 혁신적인 지면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1927년 1월에는 최초의 좌우합작운동체인 신간회 창설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3년 4월 평안도에서 ‘노다지’를 발견해 벼락부자가 된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민족지의 성격은 자취를 감추었다.

조선일보는 1936년 새해 첫날 신문에 조선총독 우가키의 ‘연두사’를 실었다. 그 내용은 마치 임금이 신민(臣民)에게 내리는 교지(敎旨) 같다.

1937년 7월 7일 일제가 ‘노구교 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해서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하자 조선일보는 일본군의 ‘연전연승’을 신나게 중계했다. 일제의 ‘애국일’인 9월 12일자 신문은 ‘황군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전 조선적인 애국’을 부르짖었다.

드넓은 중국대륙 침략을 자체 병력만으로는 강행할 수 없던 일제는 1938년 1월 중순 “조선에 지원병 제도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식민지 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겠다는 것이었다. 조선일보 1월 18일자 사설은 “이제 조선에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한다는 것은 획기적 중대 사실”로서 ‘내선일체’를 표방한 것이라고 찬양했다.

같은 해 4월 29일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생일인 ‘천장절’이었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일본 왕에게 극진한 언사로 ‘용비어천가’를 바쳤다.

조선일보 1939년 4월 17일자 1면 사설에는 보는 이가 눈을 의심할 만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전쟁을 싫어하고는 평화를 얻을 수”는 없으므로 “한 번 경천동지의 전쟁”을 일으키라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유럽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가는 길에 일본이 흔쾌히 가세하라는 뜻이다.

1940년 8월 폐간되기까지 조선일보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별 차이가 없었다. 조선일보를 받아들면 ‘천황 폐하의 성은’ ‘진충보국’ ‘총후보국’ ‘팔굉일우’ ‘대동아 성전’ 같은 말들이 어지럽게 춤추고 있었다.

* 2권 : 극우 반공적 신문으로의 변모

친일을 넘어 부일(附日)에 앞장섰던 방응모는 민족이 해방된 뒤 당연히 ‘반민족행위자’로 처단을 당해야 했지만, 조선일보 복간과 동시에 백범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노선을 적극 지지하면서 ‘민족의 대변자’로 나섰다. 방응모는 1949년 6월 김구가 남한 단독 총선거를 반대하며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서 ‘남북회담’에 참여하자 그와 결별한 뒤 조선일보를 ‘극우반공적 신문’으로 변모시켰다. 그 이래 오늘까지 조선일보는 그 성격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동아일보는 사주 김성수가 주도하는 한민당이 이승만 정권과 유착한 데 영향을 받아 한동안 친이승만 논조를 펼쳤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중도’를 표방하면서 이승만의 독재를 제대로 비판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신문’이 되었다.

1952년 1월 28일 피란수도 부산에서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압도적 다수에 의해 부결되었다. 이승만의 연임을 위한 개헌이 좌절된 것이었다. 그러자 이승만 추종세력은 ‘백골단’과 ‘땃벌떼’ 등을 동원해 관제 데모를 벌이게 하면서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른바 그런 ‘정치 파동’이 벌어졌을 때 조선일보는 그 실상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종신집권을 위해 자유당을 앞세워 자행한 1960년의 3·15 부정선거 무렵부터 조선일보는 ‘야당지’라는 평가를 받을만한 기사와 논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마산에서 일어난 부정선거 규탄 투쟁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는가 하면 4월 13일자부터 17일자까지 이승만 정권을 강하게 비판하는 사설을 잇달아 내보냈다.

조선일보는 4월 혁명 직후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교원노조 운동을 극히 소홀하게 다루다가 6월 23일자 석간 1면에 「교원노조에 대한 문교부의 부당한 해산명령」이라는 사설을 올렸다. 그러나 1960년 7·29 총선 뒤 구성된 장면 정권이 교원노조를 탄압하는 데도 조선일보는 침묵을 지켰다.

7·29 총선을 계기로 혁신세력이 ‘중립화통일론’과 ‘남북협상론’ 등을 제기하자 조선일보는 7월 10일자 석간 1면 사설을 통해 ‘반공지상주의적 통일론’ 또는 ‘타율적 정세에 의한 통일론’이라고 볼 수 있는 주장을 펼쳤다.

1961년 5월 3일 서울대 민통련이 남북학생회담을 공식 제의하기로 결정하자 조선일보는 6일자 석간 1면에 「시도의 가치 없는 남북학생회담 제의」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5월 13일 민자통 중앙협의회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민족통일촉진 궐기대회’에 1만여 명이 모여 집회를 연 뒤 그 가운데 1천여 명이 가두시위를 하면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 “배 고파 못 살겠다 통일만이 살 길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조선일보는 그 집회와 시위에 관한 기사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 3권 : 친박정희와 중도를 오고가는 기회주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주동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조선일보는 5월 19일자부터 30일자까지 ‘군사혁명’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고 미화하는 사설을 무려 12편이나 내보냈다. 「제2단계로 진입한 혁명의 완수를 위하여」「혁명의 완수와 국내외의 기대」「제2공화국의 붕괴와 최고회의의 사명」「국제적으로 공고해진 혁명정부의 위치」등이다.

조선일보는 1961년 6월 28·29일자와 7월 1일자 석간 2면에 「지도자도(指導者道)-혁명 과정에 처하여」라는 제목으로 박정희가 쓴 글을 실었다. 그기고문은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박정희 일파는 쿠데타를 일으킨 지 이틀만인 5월 18일 진보적 신문인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를 비롯한 간부 10명을 구속했다. 조용수는 결국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을 당했다. 나중에 그 일은 쿠데타세력이 저지른 ‘사법살인’으로 드러났다. 당시 조선일보는 그 사건에 관해 아무런 의혹도 제기하지 않았다.

1963년 민정이양을 앞두고 박정희가 이른바 ‘혁명공약’을 저버리면서 군복을 벗고 대통령에 출마하기 위해 ‘번의’를 거듭하던 무렵 조선일보는 상당히 비판적인 논조를 펼쳤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주도한 ‘공화당 사전 조직’에 대해서는 진상을 보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1963년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쿠데타세력이 저지른 ‘4대 의혹 사건’(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빠찡고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가 1964년 ‘언론윤리위법 파동’을 이용해 언론사주들을 어르고 달래자 조선일보는 한동안 그 ‘악법’에 저항하더니 결국 유형무형의 특혜를 받고 ‘친박정희’와 ‘중도’를 오고가는 기회주의적 신문으로 전락했다.

조선일보의 그런 성향은 1969년 9월 14일 새벽 공화당이 ‘3선 개헌안’을 단 몇 분 만에 날치기로 통과시킨 바로 그날 여실히 드러났다. 조선일보는 「개헌안의 변칙 통과」라는 사설에서 “왜 여당은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한 강자의 입장에서 좀 더 아량과 인내를 발휘 못했는가. 하루 이틀 표결을 연기하여 질서 있는 표결을 위해 야당과 협상한들 그것이 뭐 그렇게 국가 대사에 큰 영향이 있겠는가”라고 ‘개탄’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가 ‘10월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종신집권을 위한 헌정쿠데타를 자행하자 조선일보는 10월 18일자에 실은「평화통일을 위한 신체제」라는 사설로 ‘유신’을 적극 지지한 뒤 ‘유신 찬양 시리즈’를 잇달아 내보냈다.

그때부터 1979년 박정희가 비명횡사 한 날까지 조선일보는 유신독재를 제대로 비판한 적이 거의 없었다. 조선일보가 박정희의 국장이 치러지는 11월 3일에 내보낸 사설은 독재자에 대한 ‘조사(弔辭)나 다름없었다.

오늘 3천6백만 국민은 국장으로 고 박정희 대통령을 국립묘지에 모십니다.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으로 애도 드리며 삼가 명복을 비는 바입니다. (·····)  그동안 고인이 이룩한 업적은 많고 뚜렷합니다.  농촌을 일으켜 수천 년의 고질인 ‘춘궁(春窮)’을 없이 하고 농민의 의욕을 북돋아 농가의 소득을 증대시켰습니다.  국토의 근대화를 밀고 나가 처처에 공장을 세우고 일할 사람에게 일을 주 었으며 수출에 힘써 후진국을 중진국의 수준으로 올려놓았습니다. 1960년 에 80 불이었던 국민소득은 이제 1천5백 불로 늘어났습니다. (…) 착한 국민의 깊은 정으로 뿌려지는 눈물로 하여, 결코 유가족은 외 롭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유가족의 슬픔을 위로하는 동시에, 저마다의 슬 픔을 달래야 할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 고이 가십시오.

* 4권 : 전두환 용비어천가

1980년 5월 17일 ‘서울의 봄’을 유린하는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는 바로 이튿날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시위가 대대적인 민중항쟁으로 발전하자 무참한 ‘학살’로 그 사태를 ‘진압’했다. 조선일보는 광주 5월 항쟁을 ‘폭동’ 또는 ‘난동’이라고 매도한 뒤 전두환을 영웅화하는 작업에 앞장섰다. 대표적인 기사는 8월 23일자 3면 전체를 차지한 ‘전두환 특집’이었다. 그것은 대통령이 되기도 전에 그에게 바친 ‘용비어천가’였다.

그의 투철한 국가관과 불굴의 의지, 비리를 보고선 잠시도 참지를 못하는 불같은 성품과 책임감, 그러면서도 아랫사람에겐 한없이 자상한 오늘의 ‘지 도자적 자질’은 수도생활보다도 엄격하고 규칙적인 육군사관학교 4년 생활 에서 갈고 닦아 더욱 살찌운 것인 듯하다. 그가 육사를 지망한 것은 적의 군화에 짓밟힌 나라를 위하는 길은 내 한 몸 나라에 던져 총칼을 들고 싸 우는 길밖에 없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1987년의 6월 항쟁까지 조선일보는 전두환 정권의 악정과 학정을 전혀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옹호하는 ‘친위대’ 같은 구실을 했다.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뼈대로 한 ‘6·29 선언’을 발판 삼아 전두환의 후계자가 된 노태우 정권 시기에 조선일보는 수구보수세력의 대변지 구실을 ‘충실히’ 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을 불법·과격으로 몰아붙이가 하면 전교조에 대해서는 적대적 논조로 일관했다.

그리고 ‘전통야당’의 지도자를 자처하던 민주당 총재 김영삼이 1990년 1월 22일 노태우의 민정당,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과 ‘3당 합당’을 하겠다고 발표하자 조선일보는 그것을 야합이라고 비판하지 않은 채 오히려 김대중의 평민당에 대해 “이제 김대중 총재 개인의 당이라는 일반의 인식 또는 오해를 씻어줄 공당으로서의 대대적인 구조 개혁을 단행”하라고 ‘충고’했다.

노태우 정권 시기 내내 조선일보는 학생과 재야세력의 민주화운동을 극렬히 비난하면서 ‘공안정국’ 조성의 ‘확성기’ 노릇을 했다.

조선일보는 1992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김영삼이 부산 ‘초원 복국집’ 사건으로 위기에 부닥치자 그를 구해내는 작업에 나섰다. 자칭 ‘1등 신문’이 특정 후보의 선거운동에 앞장선 셈이었다. 조선일보는 초원복국집 모임이 “공식적인 대책회의라기보다는 김기춘 전 법무장관의 초대에 의한 회동이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모임의 대화 내용을 공개한 국민당 후보 정주영의 아들 정몽준이 ‘도청’을 했다고 비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맞선 대선에서 철저히 전자를 지원한 조선일보는 김영삼의 ‘문민정부’에 더러 비판을 가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우호적인 논조를 펼쳤다. 그러나 ‘소통령’이라고 불리던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이 저지른 부정과 비리가 잇달아 드러나는데다 대통령 임기 말에 ‘환란(換亂)’까지 터지자 조선일보의 태도는 서서히 바뀌었다.

조선일보는 IMF 구제금융이 거론되기 시작하던 때는 어떻게 해서든지 김영삼 정권을 구하려고 했으나 사태가 절망적으로 전개되자 “결국 지금의 우리 정부와 사회는 지난 30여년의 압축적 개발경제의 성장유산을 제대로 관리하는 데 실패했으며 그 가장 큰 이유는 가치지향과 정책자세로 새로운 변화와 질적 구조 전환의 시대를 관리하고 재단하려 했던 지배층의 오만과 미성숙에서 찾아야 한다”며 발을 뺐다.

1997년 12월의 제15대 대통령선거 기간에 조선일보는 한나라당 후보 이회창을 지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한 기사와 논설을 쏟아냈다. 특히 ‘이회창 대세론’을 위협한 ‘DJP 연합’에 대해서 조선일보는 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 5권 : 조선일보의 '노무현 죽이기'

1997년 12월의 제15대 대통령선거 기간에 한나라당 후보 이회창을 지지하고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한 기사와 논설을 쏟아내던 조선일보는 ‘DJP 연합’ 덕분에 김대중이 가까스로 당선되자 취임 직후부터 비우호적인 지면으로 정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한 지 8개월밖에 되지 않은 10월 하순 자매지인 <월간조선>을 통해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 최장집에 관한 ‘색깔논쟁’을 일으켜 그가 끝내 사퇴하게 만들었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3개월 만에 ‘옷 로비 사건’이 터지자 조선일보는 김대중 정권의 도덕성이 파탄에 이르렀다는 논조를 펴면서 맹공을 퍼부었다. 김대중은 조선·동아·중앙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의 연합공세 때문에 레임덕 직전에 이를 지경이었다.

조선일보는 김대중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햇볕정책’과 그 열매로 나타난 ‘6·15 선언’을 헐뜯고 깎아내리는 기사와 사설을 대대적으로 내보냈다. 민족의 화해와 공존을 추구하는 정책을 ‘북한에 무작정 퍼주기’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김대중 정권은 자민련과의 연합이라는 약점 때문에 언론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하지 못하다가 임기 후반인 2001년 2월 대형 언론사들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가장 주요한 표적은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였다. 조선일보는 사장 방상훈이 거액의 탈세 혐의로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기 전부터 ‘세무사찰’은 ‘언론탄압’이라고 비난하면서 김대중 정권의 핵심세력, 그리고 거의 모든 정책에 대해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김대중 역시 김영삼처럼 ‘레임덕’이 되어버린 데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앞장선 융단폭격이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2002년 제17대 대선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 노무현은 국회의원 시절부터 조선일보의 ‘천적’이었다. 조선일보는 한나라당 후보 이회창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노무현의 온갖 약점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많은 유권자들의 열렬한 지지와 SNS를 비롯한 대항언론의 힘으로 노무현이 어렵게 승리하자 조선일보는 정권 자체를 무시하는 듯한 기사와 사설을 수시로 내보냈다.

대통령 재직 중에 계속되던 조선일보의 ‘노무현 죽이기’는 퇴임 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노무현의 친인척과 측근의 비리 때문에 터진 ‘박연차 게이트’를 빌미로 조선일보는 고향인 봉하마을에서 ‘농군’으로 평화롭게 살던 그에게 무자비한 인신공격을 가했다. 그것은 총칼보다도 무서운 언어의 테러였다. 노무현이 부엉이바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죽음의 길로 간 데 대해 조선일보는 “우리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조선일보는 2007년의 제17대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정동영이 여론조사에서 이명박의 상대가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는데도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아 정권 교체를 이루겠다는 보수세력의 총력전에서 조선일보는 전위대 역할을 했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어 선거공약인 ‘대운하사업’을 ‘4대강 살리기’로 슬그머니 바꾸어도 조선일보는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 이명박이 재임기간 5년 내내 ‘미디어 악법’ 날치기 통과, 조선·중앙·동아일보와 매일경제에 대한 종합편성채널 허가 등으로 야당과 진보 진영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지만 조선일보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와는 달리 그를 위해 끝까지 ‘방탄조끼’ 구실을 충실히 했다. 그리고 2012년 12월 대선 투표일 직전 새누리당 후보 박근혜가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을 적에도 조선일보는 ‘구조대’로 나서서 박근혜의 ‘당선’에 큰 공을 세웠다.

조선일보 지면 분석의 결론, 권력과 공생하는 데에만 '1등 신문'

1920년부터 2014년 현재까지 94년 동안 조선일보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무슨 일을 했는가?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대답을 얻기 위해 그 오랜 기간에 나온 조선일보 지면을 샅샅이 검색해 보았다. 그렇게 하고 나서 우리가 내린 결론은 아래와 같다.

조선일보는 일제강점기에는 한때 압수와 수색, 지면 삭제와 정간을 감수하면서 민족지로서 일정한 역할을 했지만, 1930년대 후반에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면서 조선의 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데 앞장서는가 하면 동아시아에서 ‘남경 대학살’을 비롯해 온갖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의 행태를 ‘황군의 눈부신 승리’라고 찬양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를 포함해서 그런 지면을 만든 자들은 8·15 해방 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시기에 ‘반민족행위자 처벌’의 법망을 벗어나서 대한민국의 ‘민족지’를 이끄는 세력으로 오히려 영향력을 더 키웠다.

조선일보를 ‘대해부’ 하면서 우리는 그 신문이 94년 동안 노동의 주체로서 국가의 생존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노동자와 농민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나 논설을 내보낸 것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농민의 투쟁을 소극적으로 보도한 것 말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조선일보는 그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낸 적이 없다.

조선일보는 4월 혁명 전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으로 이어지는 보수정권 시기에 민주화운동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논조를 펼친 적이 전혀 없다. 그러면서 한국 역사상 가장 민주화에 가까이 갔던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조선일보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한반도에서 남과 북의 정권이 화해와 평화 공존을 위해 노력하도록 촉구한 적이 거의 없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은 ‘6·15 공동선언’을, 노무현 정권의 통일 의지는 ‘10·4 남북 정상 공동선언’이라는 열매를 맺었는데 조선일보는 그런 업적을 헐뜯고 깎아내리기에 바빴다.

그렇다면 조선일보는 과연 ‘무엇’인가? 2013년 2월 25일에 들어선 박근혜 정권 시기에 그 신문의 성격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국정원과 보훈처, 군대의 사이버사령부가 2012년 대선 기간에 박근혜 당선을 위해 노골적으로 개입한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조선일보는 비판을 하기는커녕 정권의 방패막이 노릇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국정원이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했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와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2014년 3월 16일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30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참사가 일어나자 온 나라가 비통과 분노로 들끓었다. ‘안전’을 국정의 최대 목표로 내건 박근혜 정부가 사전 예방은커녕 사건 발생 뒤 조치에서도 ‘구조 0명’이라는 처참한 ‘기록’을 세우자 나라 안팎에서 “박근혜는 물러가라”는 외침이 요란했는데도 조선일보는 박근혜를 구하기 위한 기사와 논설을 만들어내는 데만 힘을 쏟고 있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능력이 없음을 여지없이 드러낸 대통령 박근혜의 위기가 조선일보의 위기이기 때문이었을까? 이런 현실을 보면 조선일보는 불의와 부정으로 물든 권력과 공생하는 데서만 ‘1등 신문’일 뿐이다.

조선일보 94년의 역사는 그 신문이 ‘민족지’가 아니라 ‘반민족지’이며, ‘자유언론’이 아니라 ‘권력언론’이자 ‘폭력언론’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조선일보는 ‘사회적 공기’가 아니라 특정 가문이 지배하는 사유물이다. 조선일보에 중독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그 신문의 영향을 어떻게 받고 있는지를 깊이 성찰해야 한다.

조선일보가 지금 같은 보도 행태를 계속하는 한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하거나 민족공동체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총서를 만들면서 우리는 조선일보 ‘대해부’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 이래 2014년 여름 현재까지 민족과 민중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들의 실상을 전하면서, 아울러 조선일보가 그것을 어떻게 보도하고 평가했는지를 소개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이 총서는 그 시기를 대상으로 한 ‘사건사전’의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다. 한국 현대사를 총체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젊은 세대는 물론이고 기성세대에게도 이 총서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동아일보 대해부 5권

동아일보는 한국 현대 언론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영광을 누린 신문이다. 그런데 2014년 현재 동아일보의 위상은 어떤가? 널리 알려진 ‘조·중·동’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동아일보는 조선·중앙일보 다음 자리를 차지하는 일간지로 평가받고 있다. 이것은 다수의 언론학자들이 공식적으로 합의한 ‘정설’이 아니라 2000년대 초부터 대중 사이에 광범하게 퍼진 용어이다.

동아일보사 자체는 조선일보가 ‘1등 신문’이라고 자처하는 데 대해 공개적으로 반론을 제기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지 영향력과 판매부수 등에서 동아일보가 조선일보보다 한참 뒤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 ‘민족지’를 표방하면서 창간호를 펴냈다. 대정실업친목회라는 친일단체의 핵심인 예종석 등이 창간에 앞장선 조선일보와는 외형적으로 천지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질적 창업주인 김성수 일가가 오랜 세월에 걸쳐 교묘한 방식으로 동아일보를 사유화하는가 하면 신문 자체가 민족의 독립이나 해방과는 거리가 먼 논조를 펴게 됨으로써 민족지라는 간판은 허울만 남게 되었다.

일제가 침략전쟁을 노골적으로 시작한 1930년대 초부터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와 ‘친일 경쟁’을 벌임으로써 반민족 언론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한국전쟁 기간인 1950년대 초 부산 피란수도 시절에 이승만 독재를 비판하는 ‘야당지’로 변신하면서 조선일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영향력과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1등 신문’으로 우뚝 섰다.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해 자유당과 권력기관들이 부정선거를 자행하던 1960년 4월 혁명 이전에 동아일보는 조선일보가 감히 넘보기 어려운 강력한 매체였다.

동아일보가 한국 언론의 역사에 가장 찬란한 기록을 남기게 된 시기는 1974년 10월 24일부터 1975년 3월 12일까지였다. 동아일보사의 젊은 언론인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통해 박정희 유신독재에 정면으로 도전한 뒤 끈질긴 사내 투쟁을 발판으로 동아일보 지면과 동아방송 전파를 통해 그때까지 ‘금기’로 되어 있던 사실들을 과감하게 보도했다. 그것은 민주·민족·민중운동의 차원을 높이 끌어올린 기념비적 쾌거였다. 그러나 동아일보 사주를 비롯한 경영진은 박 정권의 광고탄압과 음험한 압력에 굴복해서 1975년 3월 17일 새벽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주역들을 폭력으로 몰아냈다.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동아일보는 특정 시기를 제외하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민족 통일을 추구하며 민중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1권은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가 창간된 때부터 1940년 8월 10일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하던 날까지를 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폐간 뒤 8·15 해방 이전까지 김성수와 ‘동아일보 사람들’이 ‘대일본제국’과 ‘천황 폐하’에게 충성을 바치며 어떤 친일행위를 했는지를 소개한다. 2권은 1945년 12월 1일자로 동아일보가 복간된 때부터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주동한 군사쿠데타 바로 전날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3권은 바로 그 5월 16일부터 박정희가 ‘심복’으로 믿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죽음을 당한 1979년 10월 26일까지를 다룬다. 4권은 박정희의 죽음 직후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노태우의 정권, 그리고 ‘3당 합당’이라는 명분으로 극우보수세력과 야합한 뒤 ‘문민정부’를 세운 김영삼 정권까지를 소재로 삼는다. 5권은 1998년 2월 25일 출범한 김대중 정권에서 노무현 정권을 거쳐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동아일보의 행적을 좇는다.

* 1권 : 대일본 제국에 충성을 바친 동아일보

일제 조선총독부의 발행 허가를 받은 3개 일간지 가운데 조선일보와 시사신문은 처음부터 친일파가 주도했다. 동아일보는 ‘국민주주’가 만드는 민족지라고 선전했지만 초대 사장에는 친일파 ‘거두’인 박영효가 취임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직후인 1920년 4월 1일자부터 29일자까지 일제를 자극하는 논설과 기사를 잇달아 싣다가 발매금지를 당했다. 9월 5일에는 「제사문제를 재론하노라」라는 사설 때문에 처음으로 무기정간 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총독부가 속간 조치를 하자 「일본 친구여」라는 제목으로 일제에 극도로 아부하는 사설을 내보냈다.

동아일보는 1924년 1월 2일자부터 6일자까지 5회에 걸쳐 「민족적 경륜」이라는 연속사설을 내보냄으로써 독립운동가들의 격렬한 비판을 받고 전 조선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춘원 이광수가 쓴 연속사설은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무장항일투쟁을 하던 전사들의 노선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한 뒤 일제가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안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의 자주적 독립 능력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었다.

1920년대에 일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개량주의적 신문 제작에 치중하던 동아일보는 1930년대 후반의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처럼 ‘천황 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미화하면서 ‘언론보국’에 앞장섰다.

동아일보가 주장하는 항일 사건은 거짓말?

동아일보가 오늘날까지 가장 두드러진 ‘항일 사건’이라고 주장해온 1936년의 ‘일장기 말소’는 독자와 대중을 기만하는 대표적 보기이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이 시상대에 올라선 모습을 담은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채 지면에 처음으로 내보낸 신문은 몽양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였다. 동아일보는 그 신문보다 15일이나 늦게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실었다. 게다가 그것이 문제가 되어 무기정간을 당하자 거사를 일으킨 기자들을 해직하고는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을 상대로 복간을 시켜달라고 끈질기게 청탁을 했다. 동아일보는 이런 사실을 숨긴 채 요즈음도 창간 기념일이 되면 ‘일장기 말소는 동아일보의 일대 쾌거’라고 자랑한다.

일본군이 중국을 노골적으로 침략하던 1937년부터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된 1940년 8월까지 지면을 보면 ‘이것이 과연 우리 민족이 만드는 신문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생일이 되면 1면 머리에 최고도의 경칭을 총동원해서 축하를 하고, 이른바 ‘애국일’에는 ‘황군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전 조선적 애국’을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폐간 당하던 당일까지 ‘언론보국의 거룩한 사명’에 충실하려고 애썼다.

* 2권 : 동아일보가 한국민주당의 기관지가 된 이유

8·15 해방 직후 한동안 몸을 사리고 있던 ‘동아일보 3인방(김성수, 송진우, 장덕수)’은 점령군으로 남한에 진주한 미군과 밀착한 뒤 일제강점기의 지주, 자본가, 관료, 언론인, 그리고 해외 유학파가 주류를 이룬 한국민주당(한민당) 결성을 주도했다. 민족의 이름으로 응징당해야 할 세력이 미군정의 비호 아래 ‘새 나라’의 정치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이었다.
복간된 동아일보는 당연히 한민당의 기관지가 되었다. 한민당 수석총무인 송진우가 동아일보사 사장을 겸하는 비상식적인 일도 벌어졌다. 송진우가 암살된 뒤에는 사주인 김성수가 같은 자리를 맡았다.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거의 없던 이승만과 손을 잡으며 1948년 8월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 적극 참여하려던 한민당은 초대 내각에서 이승만에게 홀대를 당하자 그와 결별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 이후 동아일보 지면에는 이승만을 비판하는 내용이 별로 없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진 뒤 피란수도 부산에서 국회 간접선거를 통해 부통령이 된 김성수는 한직에 머물다가 이승만의 독재가 걷잡을 수 없는 길로 치닫자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그때부터 동아일보는 이승만 정권에 가장 강하게 맞서는 야당지로 변모했다.

동아일보의 반독재적 기사와 논설은 1960년 3월의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절정에 이르렀다. 야당지로 쌍벽을 이루던 경향신문이 필화사건으로 폐간된 상황에서 동아일보의 활약은 눈부셨다. “4월 혁명을 이루는 데 동아일보의 공이 지대했다”는 평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1960년 7·29 총선 뒤 동아일보가 적극 지지하던 민주당 구파의 김도연이 국회에서 총리 인준을 받지 못하고 신파의 영수이자 천주교신자로서 경향신문의 지지를 받던 장면이 총리가 되자 동아일보는 ‘장면 죽이기’라고 볼 수밖에 없는 기사와 논설을 셀 수 없이 많이 내보냈다. 그러면서 혁신정당들과 진보적 대학생들의 남북 대화 시도와 통일운동을 ‘급진 좌경’으로 몰아붙였다.

* 3권 : 자유언론실천운동을 걷어찬 동아일보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주동한 쿠데타가 일어나자 동아일보는 5월 17일자 지면에 쿠데타를 지지하는 사설을 내보냈다. 조선일보보다 약한 내용이었지만, 어쨌든 박정희 일파가 총칼로 장면 정부를 뒤엎은 데 대해 단 한마디 비판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군사정권 아래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동아일보는 1963년 민정이양을 앞두고 박정희가 ‘혁명공약’을 휴지로 만들며 군복을 벗고 대통령에 출마하기 위해 ‘번의’를 거듭하자 강한 논조로 비판하면서 정론(正論)을 펼치는 방향으로 나갔다.

1963년 선거에서 갖은 부정을 저지르면서 야당 후보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1964년에 일어난 ‘언론윤리위법 파동’을 이용해 언론사주들을 권력에 예속시키려고 했다. 동아·조선일보와 경향신문, 대구 매일신문이 끝까지 저항했는데, 특혜를 챙긴 뒤 박 정희의 품에 안긴 조선일보와 달리 동아일보는 끝까지 노선을 바꾸지 않았다.

박정희가 종신집권으로 가려고 3선 개헌 공작을 벌이던 1968년, 동아일보사가 발행하는 월간 <신동아>에는 박 정권이 무분별하게 들여와서 정치자금의 원천으로 삼고 있던 ‘차관’에 관한 특집이 나왔다. 중앙정보부가 기사를 쓴 동아일보 기자들을 비롯해서 편집간부들을 연행하자 주필 천관우가 강경한 논조의 사설로 반격을 가했으나 결국 실질적 사주 김상만(당시 부사장)은 권력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 이후 동아일보는 박 정권의 불법적인 3선 개헌 공작에 대해 제대로 비판을 가하지 못했다.

동아일보 경영진이 박 정권에 맞서 정론을 펼치지도 못하고 굴종을 일삼고 있던 1971년 4월 15일, 동아일보사의 젊은 기자 30여 명이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했다. 중앙정보부 간부가 편집국에 ‘상근’하면서 지면 제작을 통제하던 관행을 깨뜨리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나 결과는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가 ‘10월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종신집권을 위한 헌정쿠데타를 일으킨 뒤 동아일보는 계엄령에 가위 눌린 채 단 한마디 비판도 하지 못했고 기자들의 좌절감과 굴욕감은 극에 이르렀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10월 유신’ 이후 처음으로 박정희 독재를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를 벌였는데도 동아일보에 기사가 전혀 나가지 않는 것을 보고 분노한 젊은 기자 50여명이 편집국에서 밤샘 농성을 하며 ‘언론자유 제2선언문’을 발표했으나 동아일보 지면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의 유신독재 반대투쟁은 1974년 3월 8일 한국 최초로 결성된 동아노조를 구심점으로 해서 그해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나타났다. 종전의 언론자유수호선언들과는 달리 ‘10·24 선언’은 권력에 저항할 의지가 전혀 없는 경영진을 상대로 동아일보 지면과 동아방송 전파에 자유언론의 마당을 펼치게 해달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한 것이었다.

이 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듯이, 재야 민주세력이 동아일보사 사원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열렬히 호응하자 최대의 정치적 위기라고 여긴 박정희 정권은 광고탄압을 자행한 끝에 마침내 그 회사 경영진과 야합해서 1975년 3월 17일 새벽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160여 명을 폭력으로 몰아냈다.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열매로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신동아와 여성동아에 꽃핀 ‘자유언론’은 한국 언론사는 물론이고 동아일보사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찬란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영진이 그 영광을 차버림으로써 동아일보는 1975년 5월부터 1979년 10월 박정희가 죽임을 당하던 날까지 긴급조치라는 재갈을 문 채 거세당한 언론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 4권 : 광주 5월 항쟁, 닷 새 동안 실리지 않은 사설

1980년 5월 17일 ‘서울의 봄’을 짓밟는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는 바로 그 이튿날 광주에서 일어난 대학생들의 시위가 대대적인 민중항쟁으로 발전하자 무참한 ‘학살’을 일삼았다. 광주 5월 항쟁을 ‘폭동’ 또는 ‘난동’이라고 매도하면서 전두환을 영웅화하던 조선일보와 달리 동아일보는 5월 19일부터 닷새 동안 사설을 싣지 않은 채 신문을 발행했다. 그것은 동아일보사가 신군부의 학살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못하는 데 대한 양심의 가책을 표현한 ‘무언의 저항’이었다. 사설 없는 신문을 펴낸 지 엿새째인 5월 24일 동아일보는 「유혈의 비극은 끝나야 한다」라는 통단사설을 통해 광주의 아픔을 대변했다. 그 논조는 신군부체제의 등장을 비교적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비상계엄령 아래서 ‘행간의 언론자유’를 실천한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사설 등을 통해 민주화를 위한 과감한 조치와 정치일정의 단축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1980년 5월 31일 전두환이 전면에 나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동아일보는 그 체제에 순응하는 길로 들어섰다. 8월 27일 전두환이 ‘거수기 집단’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동아일보는 본격적으로 그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이튿날인 8월 28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전두환을 영웅화하거나 미화하는 해설기사가 나왔다. ‘새 시대의 기수’ ‘우국충정의 30년’ ‘평범 속의 비범’ 같은 표현으로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떠받든 것이었다. 동아일보의 이런 기회주의적 태도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으로 전두환 정권의 말기적 현상이 나타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노태우·김영삼 정권 시기에 동아일보는 국내 정치에서는 보수 양당 체제를 옹호하면서 집권당에 대해 조선일보보다는 비판적인 기사와 논설을 내보냈다. 노태우 정권 말기인 1992년 14대 총선 때는 여당이 한맥회 대학생들을 선거에 동원하고 안기부원들이 흑색선전물을 뿌린 사실을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육군중위 이지문이 군 부대에서 자행된 부재자 투표 부정을 폭로한 사실도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남북 관계나 사상 문제에 관한 한 조선일보에 못지않은 수구적 태도로 일관했다. 전교조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노조들의 강경 투쟁을 강하게 비난한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1989년 평민당 의원 서경원이 밀입북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는 그 사건을 평민당 총재 김대중과 연결시키려고 시도했다. 1991년 경찰이 명지대생 강경대를 폭행치사한 경우에는 공권력을 질타했으나 총리 정원식이 대학생들에게 밀가루 세례를 받자 학생운동권의 반정부투쟁을 비판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김영삼 정권 말기인 1997년 ‘환란(換亂)’이 터졌을 때 동아일보는 위기설을 잠재우려고 안간힘을 쓰던 조선일보와 달리 초기부터 대책을 세우라고 경고했으나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고 안달하는 모습만 보였다.

노태우·김영삼 정권 시기에 동아일보는 양심적 보수의 입장에 서려고 했지만 강경한 반북, 반노조 성향 때문에 합리적 보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 5권 : 김대중 정권과 '철천지 원수' 사이로 변한 이유

1997년 12월의 제15대 대통령선거 때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처럼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열을 올리지는 않았다. 1998년 2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조선일보는 비우호적인 기사와 논설로 정권을 공격했지만 동아일보는 한나라당이 ‘김종필 총리 인준’을 지나치게 정치문제화 하는 데 대해 비판을 가하고 대선 기간에 안기부가 일으킨 ‘북풍 사건’도 가장 먼저 보도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3개월 만인 1999년 5월 25일에 터진 ‘옷 로비 사건’ 때부터 김대중 정권에 융단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5월 29일자부터 6월 4일까지 일요일인 5월 30일자를 빼고 무려 엿새에 걸쳐 사설을 통해 김 정권의 부도덕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과 ‘6·15 남북공동선언’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논조를 펼쳤다.

동아일보가 김대중 정권과 ‘철천지원수’ 같은 사이로 변한 것은 2001년 2월 정부가 동아·조선일보를 주요 대상으로 한 세무조사를 벌인 때부터였다. 동아일보는 실질적 사주인 명예회장 김병관이 거액의 탈세 혐의로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기 전부터 한나라당과 함께 ‘세무사찰은 언론사찰’이라고 강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 이후 2014년 현재까지 동아일보는 수구보수정당(한나라당과 그 후신인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언론으로 태도를 굳혀왔다.

2002년 12월 19일로 예정된 제1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동아일보는 민주당의 후보 경선에 흠집을 내는 기사를 잇달아 실었다. 그리고 노무현이 대선후보로 확정되자 그의 이념이나 ‘언론관’을 극렬하게 비판하면서 사실상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몰두했다.

노무현이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의 무차별 공격을 이겨내고 가까스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동아일보는 조선·중앙일보와 함께 ‘노무현 죽이기’라고 표현해야 마땅한 지면 제작에 열중했다. 특히 노무현이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고향인 봉하마을에서 ‘농군’으로 평화롭게 살던 시기에 터진 ‘박연차 게이트’를 빌미로 동아일보는 ‘도덕적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기사와 사설을 셀 수도 없이 많이 내보냈다. 그것은 총칼보다도 무서운 ‘언어의 테러’였다.

동아일보는 2007년의 제17대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 이명박의 수많은 전과와 비리에 대해서는 눈을 감다시피 하고 당시 여당이던 대통합민주신당을 공격의 표적으로 삼았다.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선거공약인 ‘대운하사업’을 ‘4대강 사업’으로 둔갑시켜도 동아일보는 이렇다 할 비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아일보사의 방송 겸영에 큰 도움이 되는 ‘미디어 악법’의 국회 날치기 통과 과정에서 드러난 위법성을 지적하지도 않았다. 2012년 12월 대선 투표일 직전 새누리당 후보 박근혜가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도 동아일보는 ‘구조대’로 나서서 그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1920년부터 2014년 현재까지 94년 동안 동아일보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무슨 일을 했는가?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에는 한때 압수와 수색, 지면 삭제와 정간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경쟁지인 조선일보를 의식한 ‘상업적 목적’의 결과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1930년대 후반에는 조선의 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데 앞장서는가 하면 동아시아에서 ‘남경 대학살’을 비롯해 온갖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을 향해 ‘황군의 눈부신 승리’라는 찬사를 보냈다.

동아일보 ‘대해부’를 하면서 우리는 그 신문이 노동의 주체로서 국가의 생존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노동자와 농민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나 논설을 내보낸 것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농민의 투쟁을 소극적으로 보도한 것 말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동아일보가 땀 흘려 일하는 민중에게 사랑과 감사의 눈길을 보낸 적은 아주 드물었다. 동아일보는 그 긴 역사의 대부분을 외세에 굴종하거나 수구기득권세력을 옹호하는 데 보냈다고 볼 수 있다.

동아일보는 특히 사상과 이념 면에서 철저히 ‘멸공’ 또는 ‘반공’을 강조해왔다. 외세가 강요한 분단을 극복하려면 민족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 자산을 되살리며 화합과 공존을 모색하라고 권유하는 것이 언론의 올곧은 길일 터인데 동아일보는 남과 북의 정권이 그렇게 노력하도록 촉구한 적이 거의 없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은 ‘6·15 공동선언’을 낳았고 노무현 정권의 통일 의지는 ‘10·4 남북 정상 공동선언’이라는 열매를 맺었는데 동아일보는 그런 업적을 헐뜯고 깎아내리기에 바빴다.

그렇다면 동아일보는 과연 ‘무엇’인가? 2013년 2월 25일에 들어선 박근혜 정권 시기에 동아일보의 수구보수적 성향은 더욱 강하게 드러났다. 정권이나 새누리당의 기관지라는 혹평을 들어야 마땅한 기사와 사설이 자주 눈에 띨 정도였다.

2012년 대선 기간에 국정원과 보훈처, 군대의 사이버사령부가 새누리당 후보 박근혜 당선을 위해 노골적으로 개입한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동아일보는 정당하게 비판을 하기는커녕 정권을 옹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국정원이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했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와도 입을 다물었다. ‘자회사’ 격인 채널A가 ‘간첩 만들기’에 앞장선 사실에 대해서도 일체 해명을 하지 않았다.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건에 관한 보도는 동아일보의 실체를 여실히 드러냈다. 대통령 박근혜와 정부 기관들의 무능과 직무태만으로 30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고 단 한 명도 구조되지 않았는데도 동아일보는 박근혜와 정권을 감싸기에 바빴다. ‘안전’을 국정의 최대 목표로 내건 박근혜 정부가 사전 예방은커녕 사건 발생 뒤 조치에서도 ‘구조 0명’이라는 처참한 ‘기록’을 세우자 나라 안팎에서 “박근혜는 물러가라”는 외침이 요란한 가운데 동아일보는 박근혜의 ‘패션 외교’를 대서특필하는 데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능력이 없음을 여지없이 드러낸 대통령 박근혜의 위기가 동아일보의 위기이기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동아일보가 1974년 10월부터 1975년 3월 초까지의 그 빛나던 ‘민주·민족·민중언론’으로 돌아가기를 바랄 수가 없다. 지금의 경영진과 구성원들에게는 외계인의 주문처럼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동아일보는 있는 사실을 없는 것으로,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만들거나 수구보수세력의 대변지가 되어 민주화와 통일이라는 민중의 염원을 외면하는 행태만은 하루라도 빨리 버려야 한다.

동아일보의 역사 94년 대부분은 ‘반민족·반민주·반민중’으로 얼룩져 있다. 그것은 ‘자유언론’이 아니라 ‘권력언론’이며 ‘폭력언론’이다. 동아일보는 ‘사회적 공기’가 아니라 조선일보처럼 특정 가문이 지배하는 사유물이다. 두 신문은 민주화와 통일이라는 과업을 가로막고 있는 최대 장애물이다.

이 총서를 만들면서 우리는 동아일보 ‘대해부’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 이래 2014년 여름 현재까지 민족과 민중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들의 실상을 전하면서 동아일보가 그것을 어떻게 보도하고 평가했는지를 소개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이 총서는 그 시기를 대상으로 한 ‘사건사전’의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다. 한국 현대사를 총체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젊은 세대는 물론이고 기성세대에게도 이 총서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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